여자에게 우정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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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
 
그 유명한 <섹스 앤 더 시티>를 보면서 가졌던 의문점은. 고작 칼럼니스트 주제에 어떻게 지미추와 마놀로 블라닉을 맘껏 신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얘네들은 어떻게 매번 이렇게 단 한 멤버의 불참도 없이 브런치를 즐기는 것인가였다. 것도 연애 중인 멤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알다시피 여자들은 남자가 생기면 여자친구를 잘 만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다기보다는 여자들은 한번 연애를 시작하면 홀라당 빠지는데, 그런 만큼 연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막 타오르는 사랑을 시작한 우리 중 누군가가 얼굴을 자주 내밀지 않거나 전화가 뜸하다 해도 우린 모두 이해한다.
 
‘걔 요새 연애해.’
 
누군가 이렇게 한마디만 해주면 다들 '아~'하는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이내 다른 화제로 넘어간다. 아무도 ‘아니 대체 남자가 생겼으면 생겼지 그걸로 연락을 똑 끊는다는 게 말이 되니? 이러니까 여자들의 우정에는 알맹이가 없다는 소리를 듣는 거야’라며 목청 높여 분개하지 않는다. 왜냐면 우리도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럴 가능성이 농후한 인간들이니까.
 
어쩌면 남자라면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새로운 여자가 생길 때마다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그 사랑이 끝나고 나면 눈물 콧물 다 짜면서 죽일 년 살릴 년 하고 친구들을 찾는다면? 남자들의 우정 세계에 대해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게이를 제외하고는 저런 남자는 같은 남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다르다. 연애하는 내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조차 없어도 가끔 지인들 사이에서 강남의 모 레스토랑에서 웬 덜 떨어진 녀석과 앉아서는 서로의 입에 샐러드며 고기 조각을 넣어주기 여념이 없더라는 목격담만이 전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해한다. 아니 이해를 넘어 그녀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 이해와 용서가 진정 크나큰 우정으로 승화되는 순간이 있으니, 그건 바로 그녀가 불현듯 ‘뭐해’하며 유독 해자를 길게 빼며 멜랑꼴리한 목소리로 전화하는 순간이다.
 
한참 열애에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녀.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나 같은 중생이 어서 뭘 하는지 궁금해지는 이유는 한가지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녀의 길고도 긴 러브스토리와 복수 3종 세트. 혹은 분노와 저주로 점철된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왜 세계의 석학들이 남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여자의 기억력과 추리력 및 상상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 좋은 머리. 부모님들이 공부 안 하려거든 나가 죽으라고 했을 때 썼더라면 우리 인생은 확실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그런 스토리를 그저 의리상 들어주거나 노는 귀에 염불 듣는다는 자비심을 발휘해서 듣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우리는 그녀들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분노하며 가끔은 ‘씨바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 같이 가서 확 조져버리자’라며 흥분까지 한다. 특히나 여기서 또 다른 제 2의 여인 따위가 등장한다면 그야말로 수화기 사이로 피가 튄다. 모르긴 해도 그놈과 그의 새로운 그녀는 꿈자리가 심히 뒤숭숭하리라.
 
만나서 열애하는 동안에는 얼굴 한번 못 본 녀석이지만 내 친구를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누구보다 전투적으로 돌변한다. 만약 정말로 얘기가 잘 풀려서 (혹은 잘못 풀려서) 그놈을 혼내주자 따위의 결론이 내려진다면 진짜로 짱돌 들고 쳐들어갈지도 모른다.
 
기지배 연애하느라 우린 보이지도 않지? 같은 서운함은 잠시뿐이다. 그렇게라도 열렬히 사랑해서 그 사랑 때문에 친구가 행복에 겨워 날마다 구름 속을 걷는 것 같기만 하다면야 연락 좀 뜸하면 어떠랴.
 
상대와 친해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공의 적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설사 데면데면하니 별로 친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를 털어놓으며 함께 씹을 ‘그 인간’만 제공한다면 10년 우정이 부럽잖다. 당장 그날 저녁 초록색 소주병과 함께 만리장성을 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누군가가 그녀에 대해 어떤 사람이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아주 좋은 사람이라고 얘기를 해 줄 것이다. 단지 그녀가 사랑에 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드물게 돼먹지 않은 놈을 만나 마음 고생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자격증을 취득한 거나 마찬가지다.
 
만약 남자들이었다면 여자와 헤어진 얘기를 아주 작은 디테일 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모조리 친구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들은 그저 ‘헤어졌다’ 정도의 결과 보고로만 끝낼 것이다. 설사 헤어짐의 이유가 그녀의 무지막지하게 나쁜 무엇 무엇 때문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친구들은 끝내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나갈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헤어졌다는 사실이지 언제 어떻게 왜 무엇을 누가 어떤 식으로가 아니니까.
 
더구나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가 실연을 하고 나서야 위로해달라고 나타나 징징대는 소리를 해댄다면 아마 그 다음부터는 아무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여자들의 특성에 대해 한없는 이해심이 펼쳐졌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가 여자라는 이름에 갇혀있다 생각했던 20대 초반에는 이런 여자들의 우정이 너무나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일단 새로운 남자를 만나면 잠수를 타는 것에서부터 어쩐지 여자들의 우정은 남자들의 그것에 비해 열등하게만 보였다. (남자들을 보라 그들은 절대 새로 사랑을 시작한다고 잠수 따위 타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들로 하여금 ‘내가 좋아? 친구들이 좋아?’ 라는 질문을 받아낼 만큼 자신들의 우정에 최선을 다한다.) 그러다 남자와 헤어지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쪼르르 달려와 위로를 바라는 꼴이란. 같은 여자지만 여자는 믿을 동물이 못 된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여자라는 생명체로 30년을 넘게 살다가 보니 이제는 저런 것들이 모두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남자를 만나는 동안에는 그 남자에게 최선을 다하느라. 혹은 자신의 사랑에 온 힘을 쏟아 붓느라 미처 친구들을 챙길 정신이 없는 것. 그리고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는 어디선가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어서 친구들을 찾아와 축 쳐진 어깨를 기대는 것. 이 모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친구들은 나를 기다려 주고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가끔은 나보다 더 예쁘고, 안 늙고, 돈 잘 벌고, 근사한 남자친구가 있는 내 친구들을 속으로 무지하게 질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내 여자 친구들이 좋다. 비록 신의 물방울을 3권까지만 안 읽었으면서 어지간한 소뮬리에 뺨 칠 듯 잘난 척을 해댄다 하더라도. 특 A급 짝퉁이 분명한 몇백만 원짜리 샤넬 시계를 진짜라고 박박 우겨도. 다이어트 중인 게 분명한데도 맛이 있네 없네 하면서 식욕 운운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일면 얄팍하면서도 질기디 질기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사랑에 상처받았을 때 진심으로 함께 슬퍼하고 분개하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나보다 더 흥분해서는 이런 식으로 감정이입하시다가는 한국의 스타니 슬라브스키 탄생하겠네 싶을 정도로 펑펑 울고 함께 흥분해주는 그녀들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을까?
 
우린 만나서 와인을 마시지도 브런치를 즐기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게 유행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흉내를 내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깐의 반짝임이다. 진득하니 우리 옆에서 우리의 우정을 토닥여 주는 것은 참으로 맑은 소주이며, 불 위에서 지글거리는 조개구이와 꼼장어. 그리고 삼겹살이다. 집에 놀러 올 때면 새로 뚫은 맛있는 떡볶이를 사오는 그녀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 떡볶이에 곁들일 어묵 국을 새벽 3시에도 콧노래 불러가며 끓이는 것이다.
 
비록 내일이면 새로운 사랑을 찾아 훨훨 날아갔다가 그 사랑이 식어야 다시 찾아든다 하더라도 그간의 행적에 대해서 우리는 100% 이해하고 공감할 준비를 한다. 그게 서른을 훌쩍 넘긴 여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1 Comments
자아지 2020.12.20 18:50  
으따 거시기혀요